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1년 지방선거 (문단 편집) === 군소정당의 의미있는 성과 === 사실 [[민주당(1990년)|꼬마민주당]]은 참패를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.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, 바로 앞 선거인 [[13대 총선]]와 비교하면 득표율에서는 민자당이 결코 이득을 본 선거가 아니었던 것. 앞선 13대 총선에서 4당의 득표는 노태우의 민정당 34%, YS의 민주당 24%, DJ의 평민당 19%, JP의 공화당 16%였다. 그리고 이 상황을 그대로 대입한다면 [[3당 합당]]으로 창당한 민자당은 34 + 24 + 16 = 74%의 어마어마한 득표율을 올려야했다. 그러나 실상은 지방선거의 특성상 무소속에 22.40%가 쏠리면서 민자당의 득표는 고작 40%에 그쳤다. 그리고 신민당은 21.90%로 고작 3%를 더 득표하며 부진했던 반면, 꼬마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14.30%라는 혁혁한 득표를 올렸다. 옛 통민당 지지자의 과반 이상을 흡수한 것이다. 또한 꼬마민주당은 양당의 쏠림 현상이 심각한 [[전라도|호남]], [[대구광역시|대구직할시]], [[제주특별자치도|제주도]]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모두 의석을 확보했다. 특히 인천, 충남에서는 각각 무려 3석, 4석을 확보해 민자당에 비해서는 매우 부족하지만 2당이 되었다. 다만 서울의 1석은 아쉬운 결과였다. 신민당은 서울에서도 고작 132석 중 21석을 확보하는데 그쳤으며, 수도권과 호남, 대전(2석), 경남(1석)을 제외한 전국에서 전멸했다. 한편, 진보정당인 [[민중당(1990년)|민중당]]은 42명이 출마하여 상당히 높은 득표율을 확보했지만(선거구당 13.3%) 전국적으로 출마한 것이 아닌데다가 당시 광역의원 비례대표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[[강원도]] 정선군 제2선거구에 출마했던 [[성희직]]의 당선으로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로 진보정당 출신의 선출직 공직자를 배출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.[* 이는 1992년 [[제14대 국회의원 선거]] 때에도 이어저 65명이 출마해 선거구별 득표율 6.50%를 획득했지만 당시엔 1인 2표제가 아니었고, 전체 득표로는 1.50%였으므로 정당 자체가 해산되었다.] 전체 득표로는 0.80%에 그쳤다. 민중당은 14대 총선과 대선에서 [[백기완]](무소속 출마)을 내세웠는데, 거의 비슷한 1%대를 득표하며 "재야" 세력의 한계를 드러냈으며, 이후 [[제15대 대통령 선거]]까지 5년간 재야, 노동세력의 존재감은 거의 사라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